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색 작전 (문단 편집) == 결말 - 독일 [[제6군]]의 항복과 독일군의 퇴각 == [[파일:external/31.media.tumblr.com/tumblr_inline_mzcr6bRlSn1r0j02r.jpg]] 이런 파국을 낳게 한 스탈린그라드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은 단순한 전략적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함으로써 정신적 승리를 이루고자 했고, 스탈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히틀러의 집착은 천왕성 작전 도중 후퇴를 할 수 있는 결정적이고 유일한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으며, 한걸음도 물러서지 말라[* 이 명령은 스탈린에 의해서 내려졌던, 명령 227호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명문화된 규율이 딱히 없었고, 조직면에서 미완성이었던 소련군의 붕괴를 막기위한, 일종의 '''규율'''이 명령 227호라면 여기서 히틀러가 내린 명령은 최고사령관의 '''작전 명령'''이었다. 상급이니 뭐니 전략상 후퇴는 뭐든 그 어떤 후퇴도 불허되었다.]는 무리한 명령의 원천이 되었다. 이는 스탈린그라드를 포기하고 만슈타인의 부대와 합류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제6군의 항복과 함께 남부집단군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A집단군은 그대로 캅카스에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소련군은 토성 작전을 계획하여 로스토프까지 진격하여, 이러한 우려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맹렬히 진격하여 1942년 12월 초에는 로스토프에서 100km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로스토프가 점령당한다면 A집단군은 캅카스에 그대로 갇혀 6군 꼴이 날 것이 분명했다. 히틀러는 이때만큼은 다행히도 A집단군 전체에 후퇴명령을 내렸고 후퇴명령과 함께 A집단군은 노련한 방어전을 펼치며 닫히려는 소련군의 포위망을 강제로 열어젖히고 빠져나갔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파울루스의 버티기의 도움을 받았다. 6군이 조금 더 일찍 항복했다면, 소련군의 가용전력이 로스토프 돌파에 모두 투입되었을 것이다. 주코프는 1월 12일 총공세를 명령했으며 800km에 달하는 전선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만슈타인]]의 노련한 지휘아래 철수작전이 진행되었지만, 독일군은 하르코프까지 일시적으로 상실하는 뼈 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만슈타인은 하르코프 근방에서 득의양양한 소련군의 공세를 돈좌시키고 반격을 가해 소련군을 섬멸하고 역공을 벌여 하르코프를 재탈환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 방어전은 소련군의 1943년 동계공세를 종료시키는 성과를 내었다([[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승리에 고무되어 무리한 공세를 펼쳤고 만슈타인은 이를 성공적으로 격파했지만, 이미 소련군 쪽으로 기울어진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다시 온전히 빼앗아 올 수는 없었다. 독일 남부집단군의 철수 작전으로 인해서 독일군은 수많은 장비와 물자를 잃었으며 성공적인 방어전에도 불구하고, 병력이 점차 줄어들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이렇게 남부전선에서 밀려나자, 르제프 돌출부에서 [[르제프 전투]]에서 전술적인 대승을 거두며 우주방어를 펼치고 있던 독일 중부집단군 제9군의 [[발터 모델]] 장군도 어쩔 수 없이 [[들소 작전]]을 통해 르제프 돌출부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모스크바 점령은 이제는 꿈도 못 꾸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